今週の木曜日に牧師按手礼拝がある。教団の協力を得て、我が教会で4年間運営していた神学校を通じて結ばれた実である。鹿浜キリスト教会を担任している神田篤講道師がその主人公である。私は28年前に牧師按手を受けた。家族と信徒たちが花束をもってきて牧師となったことを祝う按手礼拝だった。牧師として多くのことを経験しながら悟ったことは、牧師の道は決して花道ではないという事実である。むしろ、いばらの道である。より正確に言えば十字架の道である。その道は、イエス様が先に行かれて弟子たちにもついて来るように言われた道である。十字架に対する誤解が多い。苦難として考えることが多い。絶対にそうではない。イエス様が十字架で苦難を受けて、降りて来られたなら十字架は苦難である。しかし、イエス様は十字架で死なれた。だから十字架は死である。
教会の多くの問題の原因は殆ど牧師にある。そのため牧師に一番必要なのは、十字架である。すなわち、牧師が死ねば教会は生きる。反対に牧師が生きれば教会が死ぬ。牧師の大きな使命の一つは、ただすべての栄光を主に捧げることである。もう一つは、与えられた羊の群れを愛し、彼らのために命まで捨てることである。ところが、牧師が生きれば、自我を表し、その自我は欲望に向かうようになる。その結果、主に捧げるべき栄光を牧師が盗む可能性が非常に高くなる。また、羊の群れに傷をつけて、躓かせる確率がとても高くなる。度々言及しているが、キリスト教の歴史や現在の教会の実態を見ると、教会の問題はいつも教会の指導者たちから始まっている。したがって、牧師が正しくなれば、教会も正しくなる。
一般的に牧師は「神のしもべ」と言われている。その言葉が牧師の特権意識に繋がり、優越感として現れる傾向を見た。しかし、牧師は神のしもべではなくて「神の奴隷」である。ジョン・マッカーサー牧師は、彼の著書「Slave」で新約聖書のギリシャ語の原文では奴隷という単語を124回書いてあるが、翻訳版でしもべと変えられたことを指摘している。本来の意味とは異なって歪曲されたのである。彼は続けて、奴隷としもべは義務として重なる部分もあるが、二つには核心的な差があるという。しもべは雇用された存在であるが、奴隷は所有となった存在であると強く言っている。すなわち、ある人の奴隷になることは、その人の意思に従う義務がある。その人の所有物、すなわち人ではなくて物の概念であるという。牧師が十字架で死ぬまでイエス・キリストの奴隷として生きるべき理由がここにある。今週牧師按手を受ける神田篤講道師がイエス・キリストのしもべではなくて奴隷としてのアイデンティティを持つようになることを心から願って祈る。魯牧師。
“종과 노예”
이번주 목요일에는 목사 안수식이 있다. 교단의 협력을 통해 우리 교회에서 운영했던 신학교 4년간을 통해 맺게 된 열매이다. 시카하마 그리스도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칸다강도사가 그 주인공이다. 나는 28년 전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가족들과 성도들이 와서 꽃다발을 주면서 목사가 된 것을 박수 치며 축하하는 안수식이었다. 목사로서 많은 일을 겪으며 깨달은 것은 목사의 길은 결코 꽃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도리어 가시밭길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십자가의 길이다. 그 길은 예수님께서 먼저 가셨고 제자들에게도 따라오라고 하신 길이다. 십자가에 대한 오해가 많다. 고난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절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고 내려오셨다면 십자가는 고난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죽음이다.
교회의 많은 문제의 원인은 대부분 목사에게 있음을 본다. 그래서 목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십자가이다. 즉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 반대로 목사가 살면 교회가 죽는다. 목사로서 큰 사명은 첫째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둘째는 맡겨주신 양떼들을 사랑함으로 그들을 위해 생명까지 바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목사가 살면 자아를 내세우고 그 자아는 욕심을 향하게 된다. 결과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영광을 목사가 도둑질을 할 가능성이 매우 크게 된다. 또한 양떼들에게 상처를 주고 실족하게 만들 확률이 매우 높게 된다. 자주 하는 말이지만 기독교 역사를 보고 현재 교회의 실태를 보아도 문제는 항상 교회의 지도자들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목사가 바로 되면 교회도 바로 된다.
흔히 목사를 “하나님의 종”이라고 한다. 그 말이 목사의 특권의식과 연결된 우월적인 태도로 이어지는 폐단을 보았다. 그러나 목사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노예”이다. 존 맥아더 목사는 그의 저서 “Slave”에서 신약성경의 헬라어 원문에는 노예라는 단어가 124회 등장하지만 번역과정에서 종으로 대체되었다고 지적한다. 본래의 뜻과는 다르게 왜곡된 것이다. 그는 이어서 비록 노예와 종의 의무가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둘 사이의 핵심적인 차이는 종은 고용된 존재이지만 노예는 소유된 존재라고 강변한다. 즉 어떤 사람의 노예가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뜻에 순종할 의무가 있는, 그 사람의 소유물, 즉 사람이라기보다는 물건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목사가 십자가에 죽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로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주에 목사안수를 받는 칸다강도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아닌 노예의 정체성을 갖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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